<중앙일보 종교칼럼> 삶과 믿음 - 하나님 앞에서 울 때

 

조항석 목사

헬핑핸드미션네트웍 대표

뉴저지 뿌리깊은교회 목사

 

나이가 들면서 눈물이 많아지는 것 같다. 아이티에서 고아들을 만나면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장애 고아들을 목욕시킬 때면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질 않고, 새털처럼 가벼워 무게를 느낄 수 없는 아동병원의 아기 환자를 안고 죽을 먹일 때 눈물을 섞지 않고는 먹일 수가 없다. 밝게 웃는 고아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는 차창 밖을 보며 얼마나 자주 말을 못하고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설교를 하다가 목이 메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다. 십자가, 고난, 하나님의 은혜, 죽음을 무릅쓴 바울의 결단, 아이티 고아들은 쉽게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이 메게 해서 설교를 자주 중단하게 한다. 감정이 가득 실린 노래를 듣다가도 울고 찬양을 하다가도 운다. 나이가 들면 호르몬 탓으로 눈물이 많아진다는 데 딱히 그 때문만도 아닌 것 같다.


사람은 운다. 감정의 반응이 사람에 따라 달라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자주, 잘 울고 감정이 무딘 사람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울기도 한다. 평생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의 감정 속에 눈물은 슬픔과 기쁨을 함께 아우른다. 눈물은 우리의 살아 있음, 감정의 따뜻함, 삶의 여백이며 간절한 소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성경적으로 본다면 통곡은 회개의 징표이며, 눈물은 간절한 소원의 표시이다. 기쁨과 감격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절망과 좌절의 신호이기도 하다. 눈물은 자기 자신의 카타르시스이기도 하고 어려운 이들의 처지에 대한 동참의 표현이기도 하다. 기쁘고 감사해서도 울고, 슬프고 안타까워서도 운다. 개인적인 일로, 남의 일로, 나라와 세상이 돌아가는 일로 사람들이 운다.


대체로 눈물은 하나님 앞에서 효과적(?)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의 소실 하갈은 아들과 쫓겨나 광야에서 물이 떨어졌을 통곡하다가 하나님을 만나 은혜의 약속을 받았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위로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눈물의 선지라라고 하는 예레미야는 우상숭배로 인한 유다 민족의 비참한 멸망을 자신의 멸망처럼 애통해 했다. 베드로는 두려움 가운데 예수를 세 번 부인하고 새벽닭 우는 소리에 통곡했다.


교회도 어지럽고, 나라도 어지럽다. 한국도 어지럽고, 미국도 정치 경제 심지어 이민생활조차 간단치 않다. 북한이 문제이고 중동이 복잡하다. 어디 하나 평안을 누릴 구석이 없다. 사람답게 살아야 할 권리는 책에만 쓰여 있고 경제적 사회적 처지에 따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삶에 억압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 자고 나면 종교인들의 참담한 행각이 드러나 민망한 낯을 들기 어렵고, 교회가 세속화 되면서 십자가의 고난은 사라지고 부활의 영광만 높아져 참된 믿음의 가치와 모습은 무너지고 있다.


기독교는 지금 사순절 기간이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에 주일을 제외한 사십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되새기며 자기 절제와 회개의 시간으로 보내는 때이다.


나는 지금이 울어야 할 때라고 믿고 있다. 울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예레미야가 나라를 위해서 울었듯이 울어야 할 때이다. 예수님도 회개하지 않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고 우셨는데 지금이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할 때가 아닌가. 고아들의 밥을 위해 울고, 북한 동포들의 억압을 애통해 하고, 세계 곳곳에서 핍박받는 난민들을 위해 울고, 이민 사회에서 신분문제로 마음 졸이며 사는 이웃 때문에 울고,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세월호의 아픔 때문에도 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뜻에서 멀어진 교회 때문에 가슴을 찢는 애통이 있어야 한다.


사순절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다. 지금 이 어지러운 세상 가운데서 삶을 살아내야 할 우리 자신과 자녀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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